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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인풋없는아웃풋이가능한가

    따라서 나는 더욱 읽어야 한다.

  • 꿈은무엇을반영하는가

    악몽을 꿨다는 내게 애인은 그것이 물리 시험의 부담감의 무의식적 표출이라고 했다. 아주 틀린 말은 아니었다. 비록 물리 시험은 아니었으나, 내가 잠들기 전 생각한 것들이 그대로 꿈에 투영되어 나타났으니까.

    꿈에서 나는 식인 사건의 피해자였다가, 시점이 전환되며 해당 사건의 제삼자가 되어 그 사건에 관해 얘기했다.

    아래는 해당 악몽의 전문이다. 꿈에서 깨기가 무섭게 비몽사몽 간에 작성한 글이라 그리 매끄럽진 않다.

    잠들기 전 나는 모두에게 아름답게 보이고 싶어 하는 그릇된 욕망과, 그렇게 보이지 않을 때 내가 느끼는 공포를 파헤치던 중이었고, 한편으론 이틀째 날 괴롭히는 모종의 사건을 수없이 복기하는 중이었다. 꿈은 나의 심리를 날것 그대로 전시했다. 나아가 모든 걸 극한으로 증폭해서 보여줬다. 꿈에서 외부인인 나는 아름다움을 과시하며 추파를 받을 때마다 기쁨을 느꼈고, 결국엔 잡아먹혔다. 시점이 바뀐 뒤엔 ‘나’를 제삼자의 입장에서 평가하고 비난하고 동정했다(언제나 스스로를 평가하며 다그치는 현실과 닮아 있다).

    그렇다면 똥, 똥은 또 왜 강조된 거지? 원초적인 역겨움을 위해?

    무엇이 됐든 퍽 흥미로운 꿈이다. 지금껏 정신적으로 내몰릴 때마다 꿨던 악몽과도 결을 같이 한다. 억누르던 욕망의 극단적 발현, 통제할 수 없는 상황 그리고 (역겹기 짝이 없는) 약간의 성적 함의. 내가 가장 싫어하고 두려워하는 것만 모아 상영하기. 피해자성.

    해당 꿈에서부터 얻을 수 있는 정보는 더 많지만 머리가 아프다. 이만 글을 마친다.

  • 가상의시선속에서글쓰기

    제삼의 시선을 의식하며 글을 쓰니 턱턱 막힌다. 일기마저도 내 눈을 의식하며 문장을 고친다. (나는 일체의 시선을 견디지 못하는 것일까) 썼어야 할 말을 쓰지 못하고, 필요 없는 말의 분량을 늘린다.

    완성된 쓰레기.

    눈을 감은 채 글을 쓰는 법이 있을까?

    brainstorming…….

  • 태생

    태생이 나약한 인간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종종 내가 태어날 때부터 글러먹었다는 생각을 한다. 나는 예민하고, 언제나 불안에 떨며, 작은 일에도 파르르 흔들린다. 그런 스스로를 용납할 수가 없어서 시작된 자기혐오는 끝을 모른다. 너그러운 인간이 되고 싶었고 담대한 인간이 되고 싶었다. 그러나 나는 당장의 사소한 일에도 불같이 화를 냈으며 약간의 긴장 상황도 버티질 못했다.

    특히나 내가 가진 가장 큰 문제점은 불안이었다. 만성적인 불안. 그것이 나를 좀먹었다. 불안에 떠느라 많은 기회를 놓쳤고 시간을 흘러보냈다. 그렇게 모든 걸 빼앗기며 깨달은 사실은 하나, 나는 몇 안 되는 불안하지 않은 순간조차 불안해야 할 이유를 찾으려 든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불안은 내게 일종의 디폴트 값이 되어버려서, 나를 불안하게 만들던 일이 사라져도, 또다른 불안한 상황을 찾아 주위를 둘러본단 뜻이다.

    나는 불안해하느라 할 일을 하지 못했다. 할 일을 하지 못했다는 사실에 더욱 불안해졌다. 그 불안이 끝에 달하면, 그래서 경미한 공황마저 올 때면, 갑자기 초연해져서는 붙들고 있던 모든 걸 탁 놔버렸다. 마쳤어야 할 일을 아예 놔버리고, 잡아도 됐을 열정을 잘라버렸다. 그렇게 포기를 택하면 잠깐 동안 밀려드는 안도감이 있는데, 거기에 빠져들어 “다음은 다를 것”이라 공수표를 남발했다.

    불안에 떨며 일어나고 불안에 떨며 잠에 드는 것. 누군가 나를 싫어하진 않을지, 이번 일이 나의 능력 부족을 드러내진 않을지, 이렇게 한심하게 살아도 될지……. 불안할 이유는 차고 넘쳤다. 나는 수십 개의 불안을 안은 채 그걸 처리할 법을 몰라 쩔쩔 맸다. 살아 숨쉬는 내내, 쭉.

    이 불안을 태생적인 것으로 돌리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 첫째로 내겐 이 성격적 결함의 원인으로 손가락질 할 만한 트라우마나 계기가 없으며, 둘째로 나의 어머니 역시 꽤나 불안도가 높은 사람이라는 점이다. 그렇다고 해서 어머니가 내게 본인의 불안함을 쏟아냈다는 얘기는 아니다-적어도 내가 기억하는 한은 그렇다-. 그러나 어머니가 언뜻 얘기하는 본인의 과거 시절을 들을 때면 나와 유사한 점이 많아 섬뜩하곤 하다. 특히나 어머니는 친구들과의 연락을 모조리 끊은 것을 후회하는데, 이 글을 쓰다가 문득 언젠간 나도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럴 때면 우울하다. 내가 아무리 발버둥쳐도 타고난 결함을 극복하지 못할까봐 두렵다. 나이가 들면 사람이 무던해진다기에 시간이 흐르길 기다렸으나, 언제고 나는 똑같았다. 사소한 일에도 예민하게 날을 세웠고 불안에 매몰됐다.

    태생을 고칠 수 있는가? 대체 어떻게 해야 나는 편안한 마음으로 인생을 살 수 있는가. 바라던 무던함, 갈망하는 의지력을 갖기 위해선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저 인정하고 체념해야 하는가. 평생을 이런 정신머리로 살아야 함을 받아들이고?

    아무것도 모르겠다. 답이 보이질 않는다.

  • 닭장을볼때마다

    KBS 뉴스, 최민영 기자

    닭장에 든 닭을 제대로 본 것은 이번이 두 번째였다. 사진을 보자마자 도로에 놓여 있는 하얀 살코기들이 시선을 사로잡았다. 평생을 좁은 닭장 안에 갇혀 살아 도망치는 법을 모르는 닭들은 그저 멀뚱히 앉아 있었다.

    “고속도로 톨게이트에 쏟아진 닭”

    쏟아졌다고 한다. 쏟아졌으니 누군가가 와서 수거해갔을 테다. 그래, 욱여넣어지고, 쏟아지고, 수거당하는 것……. 이 안에 우리가 숭고하게 여기는 생명이란 게 존재하기는 하는가?

    처음 닭장에 든 닭을 보았던 것은 중학교 시절이었다. 좋아하던 식당에서 식사한 뒤 기분 좋게 아빠 차를 타고 가던 중이었다. 허리께까지 오는 케이지에 닭들이 욱여넣어져 있었다. 욱여넣어져 있었다고 표현하는 이유는, 그 케이지 안엔 닭들이 말 그대로 테트리스처럼 쌓여 있었기 때문이다. 서로가 서로를 밟은 채 케이지의 바닥부터 끝까지.

    그날은 처음으로 세상의 이면을 본 날이었다. 지나가는 길고양이, 발을 다친 새 따위에 연민을 느낀 적이야 많았으나 이건 결이 달랐다. 파괴였다. 무엇을 파괴하는 것인지 제대로 알지 못하면서도 그때의 나는, 이것은 최후의 무언가를 찢어발기는 행위임을 직감했다.

    역겨워서 견딜 수가 없어서 이후엔 그런 모습을 외면했다. 열악한 사육 환경 따위 알고 싶지 않았다. 알아봤자 머리아플 뿐이었다. 그래서 기사를 무시했고, 지나가며 보이는 트럭에서 애써 눈을 돌렸다. 그럼에도 어느 순간엔 마주해야겠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도로에 쏟아진 고기용 닭들의 사진을 보고, 나도 모르게 기사를 클릭한 지금처럼.

    처음 닭장의 닭을 본 날 나는 비건 선언을 했다. 치기어린 중학생의 반발은 부모님의 걱정과 은근한 식욕에 패배하여 얼마 안 가 없던 일이 되었다. 그러나 그때의 충격은 확실하게 머릿속에 남아서, 나는 나서서 고기를 찾아 먹지는 않게 됐다.

    두 번째로 고기용 닭을 마주한 지금 역시 비슷한 결심을 한다. 적어도, 혼자 있을 때만큼은 닭을 먹지 말것. 입이 심심하단 이유로 시켜먹지 말고, 채소와 고기 사이에서 선택할 수 있을 때 고기를 선택하지 말것. (닭뿐만 아니라 고기 전반에 해당된다. 사랑이 넓어지듯 연민 역시 넓어지니까.)

    나 하나 먹지 않는다고 닭이 구해지지 않음을 안다. 그러나 이건 닭을 위해서가 아니라 나를 위해서다. 내가 눈앞의 요리된 닭이 어떻게 사육되었는지를 모르는 척 음미하지 않도록, 그리하여 마지막 남은 인간성이라도 지킬 수 있도록. 적어도 나의 세상에서 이것은 최후의 인간성이다. 한 생명을 파괴하는 행위에 동조하지 않는 것은.

    어쩌면 가끔은 치킨이 먹고 싶을 수도 있다. 그리고 나는 그럴 때면 다시 이 글로 돌아와 사진을 가만히 들여다 볼 것이다. “쏟아진” 닭은 도망치지 않고 도로에 가만히 놓여 있다. 내가 먹는 것은 그러한 닭이다.

    그럼에도 입맛이 돈다면 먹으라. 하지만 그럴 수 있을까.

  • WrittenWhileDrunk

    맥주 몇 모금만에 머리가 어지러워졌다. 이때다 싶어 맥주를 들이붓고 취한 채로 글을 쓴다. 글을 쓰기 위하여 나만의 사이트를 만들어야 했다. 도메인이니 호스팅이니 서울대 컴공에 재학 중인 주제에 아는 게 없어서 고생깨나 했다. 취한 상태로 약관에 동의하고 결제를 하는 건 고역이었다.

    에어컨이 웅웅 돌아가고 크게 재생한 노래가 벽을 울리는데 나는 아찔한 정신으로 무어라 쓰는지도 모른 채 타자를 두드리며 머릿속을뒤적이고 있다. 지금 띄어쓰기를 빼먹었나? 띄어쓰기조차 헷갈릴 만큼 정신은 뒤죽박죽…… 그러니 글의 흐름이 매끄럽지 않을 것도 당연한 일이다.

    매끄럽지 않은 채로, 주제가 휙휙 바뀌는 채로 이야기를 이어가자면.

    현 상황의 보고:

    핸드폰을 바꿨다. 아이폰16pro에서 mive스타일폴더로 말이다. 스크린타임을 줄이고 싶었다. 현재 속해 있는 환경에서 멀찍이 떨어지고 싶기도 했고. 인생이 침체되었다고 느껴질 때면 이렇듯 새로운 일을 한다. 예고 없이 인생의 핸들을 꺾으며 내가 삶 전반을 통제할 수 있음을 느끼는 것이다.

    통제는 내게 있어서 무엇보다 중요한 키워드다.

    기원을 다닐 생각이다. 그냥 불쑥 가서 어떻게든 어깨너머로 배우면 되겠지. 그래도 기본기는 있어야 하니(어디까지나 최소한의 기본기) 바둑팝이라는 바둑 앱을 깔아 AI와 대국 중이다.

    복싱은 관뒀다. 더는 즐겁지 않다. 아니, 실은 대부분의 순간 즐겁지 않았다. 운동은 내게 있어서 스스로가 가진 약자성에 대한 혐오, 거기서부터 출발한 욕망의 발현이었으니까. 즐거웠던 순간이라면 첫사랑, 그뿐.

    계란만큼은 난각번호 1번을 먹어야 해. 고기를 줄일것. 특히 닭고기. 왜냐하면 나는 앵무새와 함께 사니까……. 사랑. 사랑은 넓어진다. 앵무새를 사랑한다는 것은 닭을 사랑한다는 것이고 새를 사랑한다는 것이고 가축을 사랑한다는 것이고 피지배자를 사랑한다는 것이고 그렇게 모두를 사랑한다는 것.

    첫 글을 쓴다면 그것이 무의식을 토해내는 글이길 바랐다. 따라서 취기를 빌려 쓰는 이 글은 첫 글이자 대표글로 적격이다. 그것이 낭만이라고 생각했고, 막상 그 낭만의 한복판에 들어서니 전혀 낭만적이지 않으나, 어쨌거나 취한 만큼 글은 술술 써지니까.

    그럼에도 낭만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