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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소설을 읽는데 누군가 생각난다면 그것이 사랑인가. 주인공이 사랑하는 이를 낭만적으로 묘사하는데 그 묘사가 내가 아는 사람을 연상시킨다면 나는 그를 사랑하는가. 야망 가득한 면이라든지 큰 키라든지 유순한 성격이라든지 누구나 말할 수 있는 단편적인 특징이 아니라, 사랑으로만이 쓸 수 있는 서정적인 대목에서 누군가가 떠오른다면……. 그리고 계속해서 그 사람으로 읽힌다면.

사랑인가. 그러니까, 여전히?

그 사람이 걷고 고뇌하고 고통스러워한다. 그 사람이 매혹하고 내치고 이용한다. 나는 조금은 역겨워하고 조금은 매력을 느끼며 읽고 또 읽는다. 멋대로 소설 속 인물의 심리에 그 사람의 심리를 투영한다. 너도 그랬어? 그때 너도 이런 생각이었던 건가. 소설의 인물과 그 사람을 좋을 대로 각색하고 뒤집어 붙여서 그럴듯한 인간상을 하나 만든다. 내가 이끌리는, 동시에 경멸하는 하나의 인간상을.

문득 이따위 독서는 좋지 않다는 깨달음을 얻고 머릿속에서 그 사람을 지워냈다. 인물은 다시 백지가 되고, 나는 문장을 읽어나가며 독립적인 인물을 구축한다. 지우려고 마음 먹으면 또 쉽게 지워지는 그 사람을 떠올리며 역시 이것은 사랑이 되기엔 부족했다고 생각한다. 그저 끌렸을 뿐이다. 속이 어떻든 아름다워서.

그렇다면 사랑은 무엇인가. 껍데기에 이끌리는 것으론 부족하다면 사랑은 대체 무엇인가. 무엇이 더 필요한가. 그 사람만큼 내 마음에 쏙 드는 외모가 없었는데 나는 그는 사랑하지 않고 다른 사람은 사랑했다. 무엇이 기준인가.

유일하게 사랑했던 사람은 동성이었다. 내가 양성애자라는 가능성 따윈 모른 채 살아가던 이십대 초의 일이었다. 처음엔 동경이라고 생각했다. 아니었다. 동경은 이 모든 감정의 소용돌이를 설명하기엔 당위성이 부족했다. 그건 첫사랑이었다.

나는 하루 내내 그 사람을 생각했다. 그 사람이 별 생각 없이 던진 한 마디가, 그게 너무 좋아서 펜으로 몇 번을 따라 썼다. 마음이 부풀었다. 그 사람과 너무 가까이 있을 때면 표정을 관리할 수가 없었다.

사랑의 증거가 넘쳐 흐름에도 불구하고 동경인가 사랑인가 지난한 고민을 이어오던 시절. 사랑한다면 키스할 수 있다는 말에 키스와 그 이상의 것을 상상해보다가 죄스러워 관두던 시절. 힘들 때마다 그 사람을 떠올리던 시절. 그 사람이 다른 여자와 친한 걸 볼 때마다, 내게 보이지 않는 말투로 대화하는 걸 들을 때마다, 신경이 쓰여 미칠 것 같던 시절.

사랑이라면 그것이 사랑이었다. 너무 사랑이라서 그 사람이 동성이라는 제약 따윈 훌쩍 뛰어넘고, 자연스럽게 내 성적 지향을 인정하게 되던 그것이야말로 사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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